작년 가을,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은 정말 비현실적이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은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성에 의해 가능했다고 볼 수 있으나, 문학상은 정말 능력이 탁월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대단한 상(찾아보니 부커상)을 받았다고 해서 [채식주의자]를 읽었다가 깜짝 놀란(작가님의 창의적인 발상에) 이후로 그 다음 소설들은 읽지 못했다. 학창 시절부터 사랑해왔던(거의 모든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하루키가 몇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에서 고배를 마셔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한강 수상 소식이 더욱 놀라웠던 것도 있다. 한강의 신작 [빛과 실]을 우연히 동료 책상 위에서 발견하고 맨 앞에 수록된 노벨 문학상 강연문을 이제야 읽었다.(당시에 유튜브로 잠시 접했지만 읽어볼 생각을 하진 못했다.) 그녀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될 수 밖에 없구나 고개가 끄덕여졌고, 집에 서 있던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어보리라 결심했다.
장편 소설을 쓰는 일의 특별한 매혹
그후 십사 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그 이듬해에 단편 소설을 발표하며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오 년이 더 흐른 뒤에는 약 삼 년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지금도 좋아한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칠 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모든 장르의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장편 소설을 쓰는 일이 특별히 매력이 있다고 하는 그녀, 그 이유가 놀라웠다. 몇 년의 시간 동안 질문들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을 변형시키는 과정이 좋다니. 그녀가 쓰는 소설의 대부분의 그렇듯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을 다루는 시간들이 때로 외롭고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일일텐데, 그 과정에서 끝없이 자신의 더 깊은 곳을 만나는 그 인내와 성찰의 힘이 느껴졌다. 그녀가 표현한 변형이란 아마도 놀라운 성장이 아닐까 싶다.
소년이 온다를 쓰게 된 이야기
그 시점까지(다섯번째 장편소설을 쓸때까지) 나는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사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살이었다. 쿠테타를 일으키니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 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러니까 2012년 봄(다섯번째 장편소설을 끝낸 봄), '사람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 후 일 년 가까이 새로 쓸 소설에 대한 스케치를 하며 1980년 5월 광주가 하나의 겹으로 들어가는 소설을 상상했다. 그러다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것은 같은 해 12월, 눈이 몹시 내리고 난 다음 날 오후였다. 어두워질 무렵 심장에 손을 얹고 얼어붙은 묘지를 걸어 나오면서 생각했다.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그녀는 광주 출신이다. 광주에서 이사오면서 살던 집을 내어줬는데, 그 집에 살던 소년이 바로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이다.
그 놀라운 인연이 치열한 성찰과 예술적 집념 속에서 문학적 성취로 빚어진 것이라 생각하니 경이롭다. 소설을 쓰기 위해 소년의 가족들과 만나 허락을 구함은 물론이고 자료 수집을 위해 대화를 꽤 나눴다고 한다. 가슴에 한이 된 아들, 동생의 이야기가 노벨 문학상을 타는 작가를 만나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가족들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을까. 그 억울함과 슬픔을 글을 읽는 전세계인(나를 포함해)이 나눠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열 살에 품고 40대에 사람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로 광주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소년이 온다]를 다 읽은 지금도 그것이 눈부시게 밝은 소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을 껴안는 소설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두 개의 질문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광주에 대한 소설을 위한)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20대 중반부터 일기장 맨 앞에 두 질문을 계속해서 적어왔다는 것이, 작가로서 글을 통해 과거를 돕고, 죽은 자를 구하고 싶은 그녀의 소명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가지고 20년 넘는 세월을 살며 글을 쓰는 하루 하루의 밀도가 얼마나 진할지, 내면이 얼마나 깊을지 나로선 상상 밖이다. 다만 역사 속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기는 커녕 마주하고 파고들고 함께 고통을 느끼며, 그 과거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깨울 수 있는 글을 적어나간 용기가 참 감사했다.
매일의 삶에서 작고도 중요한 질문들을 끌어안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강님 감사합니다.
https://www.youtube.com/live/u6Ao9KHW9mI?si=JHIKsvaCzDAEUJ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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